'달과 6펜스'중 일부 발췌

1
예술가의 마음 속을 계속 살피다 보면 추리 소설을 읽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우주의 비밀처럼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을 뿐이다.
스트릭랜드(=이 소설의 주인공)의 그림들 중 아무리 볼품없는 그림조차도 그 안에는 그의 특이하고 고민에 찬 복잡한 개성이 엿보이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싫어하는 사람도 그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며, 그의 생활과 성격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2
그녀(=스트릭랜드의 아내)는 시골에서 아주 조용한 청춘 시절을 보냈다.
특히 '뮤디 순회 문고'에서 보내 오는 소설들은 그녀에게 런던의 로맨틱한 생활도 로맨틱한 분위기도 전해 주었다.
그녀는 정말 독서를 좋아했다(이것은 문학 소녀에게는 드문 일이다. 문학 소녀란 대개 소설보다도 그것을 쓴 작가에게, 그림보다도 그것을 그린 화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자기 안에 상상의 세계를 만들었고, 일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그 안에서 맛보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그녀는 여러 작가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전까지 관람석 쪽에서만 바라보고 있다가 이제는 무대로 자기가 직접 용기를 내어 나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3
그들 내외(=스트릭랜드와 그 아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이를 먹을 것이고, 아들과 딸도 성년이 되어 제각기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한쪽은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 결국 건강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고, 또 한쪽은 남자답게생긴 청년으로 틀림없이 군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말년에는 그들 부부도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자식과 손자들에게 둘러싸여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행복한 생애를 보내며 오래오래 살다 저 세상으로 갈 것이다.
틀림없이 이것이 수많은 세상 부부들이 걷는 인생 행로일 것이고, 그 생활 속에서는 소박한 아름다움마저 엿볼 수 있다.
그것은 푸른 목장을 빠져나가 상쾌한 나무 그늘을 지난 다음, 소리도 없이 굽이쳐 흘러서 마침내는 큰 바다에 이르는 조용한 시냇물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 바다는 너무나 잔잔하고 고요하며 무표정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될지도 모른다.

4
그(=스트릭랜드)는 이미 청춘 시절을 지난 사람이다. 안정된 사회적 지위 그리고 아내와 두 아이까지 있는 증권 중개인인 것이다.
내 나이에 화가를 지망했다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그런 그가 화가를 지망한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물론 기적이 일어나는 수도 있으니까, 당신이 대 화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죠.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런 가능성은 만에 하나일 걸요. 고생만 죽도록 하고 아무 결실도 없이 결국 단념해야 하는 경우가 온다면, 그럼 정말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을 거 아닌가요?"
"그래도 나는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어요."
그는 되풀이했다.
"그럼 당신이 앞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삼류 화가로 그친다면... 그래도 모든 걸 버린 만큼의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실 건가요?"
"정말 당신은 바보같네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뻔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 바보라면 뭐 할 말은 없겠지만."
"그러니까... 그리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고 했잖습니까. 이 마음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거에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를 따지고 있겠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물 속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애를 쓸 것 아닙니까?"

5
타히티 섬은 짙푸른 계곡이 이중삼중으로 겹쳐 있고, 그 그늘은 조용한 골짜기를 상상하게 하는 높게 치솟은 푸른 섬이다.
차가운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그 어두컴컴한 골짜기에는 뭔가 깊은 신비가 깃들어 있고, 이러한 산 그늘에 자리한 부락에는 사람들의 기억이 미칠 수 없는 먼 태고적 생활이 옛날 모습 그대로 영위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여기에도 슬픔과 공포가 있겠지만, 그런 인상은 순간적인 것이고 오히려 그 뒤에 찾아 드는 환희를 더욱 깊이 느끼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그것은 마치, 관객들이 어릿광대의 유머에 폭소를 터뜨리고 있을 때 문득 그 어릿광대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한 줄기 쓸쓸함 같은 것이다. 그가 웃음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견디기 힘든 고독을 느끼기 때문에, 그의 입술은 미소를 띠고 그 유머는 더 즐거워 보이는 보이는 것이다.

6
이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나 다 외톨이이다. 우리는 그저 황동탑 속에 갇혀서 동료들과는 부호로 의사 소통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그 부호조차도 뭔가 공통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고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자기 마음속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남에게 전하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지만, 상대방에겐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힘이 없다.
이렇게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저 동료들에 대해 알 수 없으며, 또 저들도 나를 알지 못한 채, 절대 맞닿지 않는 평행선 위을 오로지 혼자서 쓸쓸히 걸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음속으로는 온갖 아름답고 신비로운 것을 생각하고 있지만, 말을 잘 모르는 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결국 회화 책에나 나오는 진부한 말밖에 못 하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그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샘솟고 있는데도, '정원사 아주머니, 우산이 집 안에 있습니다' 정도의 말밖에 못 하는 사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