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에서 십여 킬로미터쯤 차를 달려 의신마을에 도착해서 입구에 차를 두고 십 분쯤 걸어서 산으로 올라가니 문득 모습을 드러낸 토굴 한 채. 그렇게 다녔어도 무조건 머물러 살고 싶은 마음이 든 그리 아름다운 암자는 처음이었다. 진정한 오두막집으로 부를 만한 작은 토굴 한 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암자가 나타나자 함께 간 일행은 모두 탄성을 질렀다.

산이 바다와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끝없이 펼쳐졌던 지리산 능선들. 그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 같은 암자, 연암. 은암이라고도 불린다는 말씀에 동감했다.

이십여 년 전, 마을 어른들에게 절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나서 터를 발견하고 토굴을 지었다는 도현 스님의 말씀으로는, 조선시대 부용 영관 스님이 사셨던 절이라고 한다. 전쟁으로 소실되었는지 절터만 남아 있던 곳에 손수 스님이 토굴을 지었다고 하는데 건축가 뺨치는 실력으로 지은 진정한 의미의 토굴이었다.

"모두 몇 평이에요?"라는 성급한 질문에, "세 평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방 하나, 마당으로 나오는 쪽마루, 부엌이 전부인 집이었다. 세 평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비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당가에는 조촐하게 파놓은 연못까지 있었다. 마당 한편에 펼쳐놓은 모기장은 스님이 밤이면 별빛 달빛을 벗 삼아 정진하는 선방(?)이라고 한다.

방에 모신 부처님께 절하고 벽장도 열어보고 선반에 놓인 몇 권의 책도 들여다보고 마루로 나와 창문 밖으로 나타난 지리산을 바라보느라 한참이나 앉지를 못했다. 부엌은 밖으로 나 있어 독립된 느낌이 들었는데 취사도구는 보이지 않고 부뚜막에 걸어놓은 솥 하나가 전부였다. 나중에 들으니 버너에 누룽지를 끓여 드시거나 라면 등 간단하게 드신다고 했다.

스님을 포함해서 다섯 명이 그 조그만 집에, 한 사람은 방에, 스님을 비롯한 네 사람은 모두 마루에 앉아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 넉넉하게 느껴지던지, 그야말로 방과 마루와 부엌이 황금분할로 설계된 집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 좋으시죠?"

"좋죠. 어떤 때는 내가 춤추고 싶을 때가 있어요. 한번은 아궁이에 불이 억수로 안 들었거든요. 그러다가 아궁이를 고치고 나서 불을 때고 굴뚝에 가보니 연기가 위로 잘 올라가는 거예요. 너무 좋아서 누구한테 말하고 싶은데, 보는 사람이 있어야죠. 토굴에 살면 그런 재미가 있어요. 이렇게 사람이 안 찾아오는 날엔 나무나 새들, 짐승들하고 교감이 생겨요. 돌위에 쌀이나 라면 쪼가리를 올려놓으면 그들이 찾아옵니다. 제일 먼저 찾아오는 놈이 쥐란 놈입니다. 한 번 왔다가서는 소문을 내서 함께 오죠. 그런 그들과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 말씀 끝에 스님은 "뭐든 줘야 옵니다. 주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게 진리라요"라고 했는데, 그 말씀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세상이, 그리고 나와 관계된 사람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준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돌아보게 했다.

스님의 홀로 사는 토굴 생활 예찬은 끝이 없었다.

"산중은 하루에도 색깔이 변해서 빛이 내려와 마당을 거쳐 저 산으로 내려가죠. 그리고 여름이면 찔레꽃 향기가 말도 못해요. 숲길을 걸으면 찔레꽃이 뭉게뭉게 피어서 향기가 대단해요. 칡꽃 향기도 좋고."

"겨울엔 어떻게 지내세요? 눈이 오면 발이 묶이지 않나요?"

칡꽃 향기는 어떨까 생각하고 있는데, 홍처느이 깊은 산골에 사는 사진작가 김민숙 선생이 물었다. 홍천의 작은아니라는 동네도 눈이 자주 오는 곳이고 눈이 오면 발이 묶이는 동네다.

"눈이 발목까지 묻힐 때는 꼼짝없이 갇혀 지내죠. 눈이 많이 오면 한 이틀씩 마을까지 오는 차도 끊기죠. 언젠가는 바람 한 점 없는데 함박눈이 내리는 거예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밤새 나무 위에 내린 눈 위에 덤으로 함박눈이 내리는 겁니다. 아궁이에 불을 뜨끈뜨끈 때놓고 딱 앉아 있으니까, 함박눈이 내려오는데 토굴이 하늘을 올라가는 거예요. 상상이 됩니까? 혼자 살면 그런 프리미엄이 있어요."

스님은 젊은 시절, 송광사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과도 함께 사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강원도 화전민이 살다 버린 집을 개조해서 머물고 계신 법정 스님 사시는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최소한의 물건만 지니고 사는 조촐하고 청정한 암자. 마당가에 만들어놓은 작은 의자 하나까지 예술작품 같아 보였다.

승려새왈 사십여 년 동안 주지 한 번 한 적 없이 선방에서 이십 년동안 공부하시다가 태국에서 오 년 동안 위빠사나 공부를 한 다음 이곳에 들어와 살고 계신데, 스님은 그렇게 홀로 지리산에서 사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든다고 했다.

"여기 와서 이렇게 살면서 내 캐릭터에 맞게 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누가 시며 사는 것도 아니고, 선택해서 사니까 편하고 좋아요. 행자 때 농사를 지어봐서 일머리를 아니까 이곳 사람들과 이야기가 되어요. 토굴에 사는 것도 어릴 때 일하고 나무 한 것이 도움이 되어서 편리하고 좋아요. 그런 노하우를 모르면 토굴에 못 살아요. 산에서 나무해다가 반은 때고 반은 저축해두고 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작은 오두막집 담장에 쌓아둔 정갈한 장작더미 또한 스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듯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어릴 때 출가해서 농사를 지으면서 '일은 해야 줄어든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무슨 일이든 피하지 말고 정면 돌파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스님께선 어려서부터 일하는 과정을 즐길 줄 알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일도 하다 보면 줄어들더라고 하시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네 사는 것도, 어떤 슬픔이라든가 고통고 돌파하다 보면 하나씩 줄어들겠다 싶었다.

"내 삶의 철학은 과정을 목적시 하는 겁니다. 지금 이렇게 중노릇을 해도 '깨치는' 것은 생각 안 합니다. '견성성불'은 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는 거예요. 한 순간 한 순간 깨치는 생활을 해야죠. 나는 '찰나 열반'이라는 말을 잘 써요. 한 순간 한 순간 내가 깨어 있을 때가 찰나 열반이에요. 미몽에 깨어 있고 타인에게 깨어 있고, 자기 자신에게 깨어 있는 그 상태가 찰나 열반입니다. 찰나 열반의 상태를 오늘은 오 분에서 내일은 육 분으로 조금씩 늘려가는 것을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정을 목적시하면 중노릇이 즐거워져요."

박원자. <인생을 낭비한 죄>. 김영사. 2013. 142~14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