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에서 가까운 스튜디오에서 실물 드로잉을 하고 있다. 이 모임은 특별한 제한이 없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색칠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드로잉만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남자는 노트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도 초크와 파스텔로 그린 것 같은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세 시간짜리 해부학 강의도 들었는데 발이나 골반 같은 곳의 내부 구조를 배웠다. 매혹적이었지만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사람의 몸을 그리는 건 어렵다. 누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인체에는 생소한 모양과 굴곡진 곳이 너무나 많다. 어렵기로는 아마 최고일 것이다.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몸에 대해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우린 사람의 형상을 멀리서도 알아보고 수천 명 중에서도 친구를 찾아낸다. 축구 경기장이나 기차역 같은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낯익은 얼굴들을 찾은 적이 있지 않나? 의지할 거라곤 코의 각도나 눈 크기의 미묘한 차이, 코와 광대뼈의 관계 같은 아주 작은 차이점뿐인데도.

머리를 자르고 수염을 기르고 메이크업을 하고 모자를 써도 우린 복잡한 경기장에서 그들을 찾아낼 수 있다. 군중 속에서도 어머니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를 분별할 수는 있지만 몽타주를 만들 만큼 정확하게 모습을 묘사하지는 못한다. 얼굴의 바다에서 정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는 그 특징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나체를 실물로 보는 건 아주 드문 일이지만(한 시간에 몇 명을 본다고 생각해 봐라.) 나체를 그릴 때는 낡은 생각들을 버리고 편견 없이 명확히 봐야 한다. 또 각 부분들, 선, 그림자, 구부러진 곳, 굴곡진 곳 등으로 쪼개서 보아야 한다. 사물을 그릴 때에 저지를 부정확함은 인체를 그릴 때에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코의 미묘한 각도 차이가 우리가 그리고 있는 '메리'를 '수'로 바꾸거나 '밥'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반면 너무 천천히 그리거나 완벽하게 그리려고 재어 보거나 한다면 '메리'의 균형감이나 무게감을 포착하지 못해 부피도 입체감도 없는 종잇조각이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쁜 건 그녀의 인간적인 면, 즉 개성, 인격, 생기를 잡아내지 못한다는 거다. 그러면 그녀는 '메리'가 아니라 단지 몸, 살덩이, 동물, 해부학 모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본다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릴 때 필요한 객관적인 시각에 건전한 주관성을 더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부학 책을 보고 관절의 구부러진 정도나 각 부분의 정확한 비례에 대해 배울 수 있겠지만 그렇게 그린 결과물은 만화 주인공이나 마네킹이 되고 만다. 드가나 로댕처럼 그리려면 이런 원리가 완전히 흡수될 때까지 그리고 또 그려서 제 2의 천성처럼 만들어야한다. 그래야 느낌과 반응으로 가득 차게 만들 수 있다.

인체를 그리는 게 아닐지라도 인간적인 느낌을 불어넣는 건 성공적인 예술의 핵심이다. 복숭아나 해변, 거머리를 그릴 땐, 그림을 보고 뭔가 진짜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기법적인 걸 초월하는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 복숭아와 거머리에서 뭘 느끼는지, 나아가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건데 그 진실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보편적이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완벽해진다. 기법, 해부학, 빛, 색채, 재료 등에 통달하면 그게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그리려는 사람의 정직성, 개방성, 상냥함, 분별력, 흠, 진실성 등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조종대를 쥐게 된다. 사람을 그리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 어려운 일인데, 진정으로 잘하려면 우리 자신도 조금은 벌거벗어야 한다.

대니 그레고리, <창작 면허 프로젝트>, 김영수, 세미콜론, 2011, 96~9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