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다.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잘 그릴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자, 생각해 보자.

보는 것은 언어와 같다. 개, 나무, 차, 사람....... 우리는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했다. 명명하는 것은 추상적 사고를 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추상적 사고에 너무 익숙해져서, 추상적 사고로 직접 보는 걸 대신하게 됐다.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보는 것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우리는 "나무"라고 말하지 "느릅나무"라고, "35년생 나무로 몸통에 동쪽 방향으로 은색 나무껍질이 주먹만큼 벗겨져 있고 높이는 11미터 가량에 겨자색이 일부 섞인 3만 7437개의 잎이 달린 느릅나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언어가 아무런 구실을 못하는 지점, 사물이 너무 구체적이어서 이름을 가질 수 없는 지점, 즉 사물이 정말로 실재하는 다음단계로 나아가는 길을 완전히 놓치고 만 것이다.

여기서 드로잉이 시작된다. 어떤 사물을 천천히, 아주 주의 깊게 살펴보는 거다. 다른 뭔가를 위해서 보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순간, 그 빛, 그 각도에서 보이는 그대로 사물 자체를 살펴봐야 한다.

보기 시작했으면 우리를 틀에 가두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 판단하지 말고 선입견도 갖지 말고 역사적이고 낡은 인습도 다 버려야 한다. 보는 것에 집중하면 시간이 점점 느려져 결국엔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잊게 된다. 펜을 잡고 당신이 느낀 모든 감정을 실어서 그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펜촉을 움직여 그리는 거다. 예술이 어떻다든가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라든가 내가 미숙하고 못나고 멍청하고 제멋대로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따위 접어 둬야 한다. 청구서나 두통, 불평거리, 집안일들을 모두 잊고 펜, 종이, 그릴 사물 그리고 나 자신만을 생각해야 한다.

눈앞의 사물을 보면 볼수록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든다. 윤곽선을 그린 다음 질감과 그림자를 그리고, 더 세부적인 질감과 그림자를 그린다. 오렌지, 나무, 인체 등은 눈이 가로지르는 풍경이나 마찬가지다. 펜이 그리는 선은 그 풍경 속의 언덕을 넘어 계곡을 내려가고 빛과 그림자를 통과하는, 모험과 놀라움의 세계로 당신을 이끈다. 그리고 그 여행은 결국 출발점인 집으로 돌아온다. 떠났던 부두나 현관문 앞에 그저 갑자기 돌아온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놀이공원의 회전목마가 그러하듯 세상이 천천히 회전하여 제자리로 돌아오고 당신의 모든 감각도 더욱 예리해지고 새로워져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린 그림은 당신의 여정을 기록한 지도이기도 하고 기념품이기도 하다. 또 당신의 시각이 정확할 수록 그림도 정확할 것이다. 그 그림은 그냥 간직해도 좋고, 액자에 끼우거나 팔아도 좋다. 뭐가 문제인가. 이 여정의 굽이굽이가 당신 마음속에 간직될 텐데.

대니 그레고리, <창작 면허 프로젝트>, 김영수, 세미콜론, 2011, 44~4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