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방에서 군 복무를 했다. 우락부락한 외모나 마초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서인지 방위 근무를 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래 봬도(?) 최전방에서 현역 근무를 한 이력을 갖고 있다. 내가 입소했던 논산훈련소에서는 보통 훈련을 마치면 후방으로 가게 되는데 내 입소 동기들 오백 명 중 단 두 명만이 전방으로 배치를 받았다. 그중 한 명이 나였다. 그때는 운이 지지리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 덕에 쉽게 하기 힘든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듯하다.

부대가 있는 곳은 완전히 산골이었다. 나는 대포를 쏘는 포병이라는 보직을 받았는데, 보병들보다는 덜 고생을 한 것 같지만 그래도 산골에서 군생활을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참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내게 정말 큰 위로가 된 것은 나중에 몰래 갖고 들어간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였다. 물론 그것도 소위 '짬이 찬 후'에 갖고 들어간 것이다. 대놓고 갖고 다닐 형편까지는 되지 않아서, 쇠로 된 상자 안에 기기를 담아 땅에 묻어둬야 했다. 나는 그것을 '금고'라고 불렀는데, 휴식시간 등 여유가 날 때마다 몰래 산에 올라가서 금고를 파내 음악을 듣곤 했다.

클래식음악만 들은 것은 아니었다. 김현식의 노래 같은 대중음악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즐겨 들은 것은 슈만의 피아노 사중주 중 3악장 '안단테 칸타빌레'였다. 언젠가 휴가 때 LP로 갖고 있던 그 음반을 테이프에 정성스레 녹음했다. 이 테이프를 부대에 갖고 복귀해서는 듣고 듣고 또 듣고,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들었다. 언제 들어도 마냥 좋았지만 특히 눈 덮인 겨울산의 철책을 바라보면서 들을 때면 색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뭐랄까, 좀 애잔한 느낌이랄까. 군 복무를 하는 와중에, 몸이 와들와들 떨리는 추운 겨울에, 쌓인 눈과 함께하는 '안단테 칸타빌레'

는 마음에 스산한 바람을 불게 만들었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나둬도 돌아간다고 했던가. 시간이 흘러 나는 내무반에서는 장성급보다도 권력이 세다는 말년병장이 됐다. 제대 날짜만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날, 보초를 서고 있을 때였다. 보초를 서면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말년병장이 모든 규칙을 지킨다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등병 꼬마와 둘이서 한 조가 됐던 나는 녀석과 교대를 하고 밖에서 혼자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역시나 '안단테 칸타빌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 다 돼 보초를 서며 듣자니 그 느낌이 또 달랐다. 그렇게 나는 음악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음악에 너무 취한 탓이었을까.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감찰을 나온 부관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중위면 포대장인 대위보다는 일반 사병과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빠진' 행동을 눈감아줄 리는 없었다. '아, 병장 말년에 잘못 걸렸구나.' 제대 직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다녀야 한다더니, 까닥하면 전역도 못 하고 영창에 갈 상활이 된 것이다. 이어폰을 빼지도, 음악을 끄지도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내게 부관이 물었다.

"뭐 하나?"

내가 대답할 말을 찾는 사이, 그가 다시 물었다.

"무얼 듣고 있나? 한번 줘보지."

잔뜩 겁을 먹고 건네준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꽂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이지 예상 밖이었다.

"슈만이군."

내가 군대를 늦게 간 편이니, 그 부관은 나이로 치면 나와 비슷한 또래였던 것 같다. 사관학교 출신의 직업군인이었는데, 음악에는 전혀 관심 없을 것 같은 모습을 해갖고는 잠깐 듣고 바로 슈만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다니 의외였다. 첫 부분도 아니고 곡의 중간쯤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행동은 더욱 당황스러웠다. 내게 앉으라고 하더니 자신도 없에 앉아 음악이 끝날 때까지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자도 아니고 남자와, 그것도 시커먼 군인과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썩 낭만적인 일은 아니지만, 그때의 기억은 매우 따뜻하게 남아 있다. 군대, 그것도 최전방에서 규율을 집행하러 온 부관과 함께라는 삭막한 상황에서,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어디 흔하겠는가.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나치 장교 앞에서 쇼팽을 연주했던 유대계 주인공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3악장이 끝나자 중위는 이어폰을 빼고는,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군생황활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다.

전역을 하고 십 년 정도 지난 후, 그러니까 잡지사에서 한창 일하고 있던 어느 겨울이었다. 지하철을 탔는데 열차 내에서 클래식음악이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짐을 갖고 다니면서 클래식 소품 전집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얼굴. 아, 그때 그 부관이었다. 그런데 아는 척을 하기가 좀 난감한 상황이었다. 곧 이 칸을 지나쳐 갈 텐데,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가운데, 그는 음악소리와 함께 다음 칸으로 넘어가버렸다. 따라서 건너가볼까, 어쩌지 하고 있는 와중에 내려야 할 정거장도 지나쳐버렸다.

그런데 그때 그가 다시 내가 있는 칸으로 돌아왔고, 열차가 서자 그 길로 내리는 것이었다. 무슨 역인지도 모른 채 그만 따라서 내려버렸다. 그리고 무작정 그를 따라갔다.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역사에서 지상까지 이어진 계단을 열심히 올랐다. 그런데 쫓아가면서도 차마 부를 수가 없었다. 그가 민망해할 것도 같고, 아는 체를 해봐야 무슨 말을 할까 싶어서였다. 말 붙이기를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때였다. 그가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어이쿠 소리를 뱉어버렸고, 그렇게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돌아서던 몸 역시 그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윽고 말을 꺼냈다.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은데요."

얼굴을 본 지 십 년 가까이 흘렀고, 나는 수많은 사병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런데도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반가워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막상 서로를 알아보긴 했지만 우려대로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우리는 잠깐 동안 서로를 말없이 바라봤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내가 더듬더듬 인사말을 찾고 있던 차에 그가 갑자기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선물로 줄 게 하나 있다고 했다.

그가 건넨 것은 한 장의 CD였다. 전화번호를 받아 적기 위해 수첩을 꺼내면서 무슨 CD인가 흘낏 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대에서 주야장창 들었떤 슈만의 피아노 사중주, 그것도 외르크 데무스와 바릴리 콰르텟이 연주한 그 음반이었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라는 레이블에서 발매된 음반은 빈에서 녹음된 고풍스러운 명연으로 내가 LP를 테이프로 녹음해서 듣고 다닐 만큼 좋아한 연주였다. 그리고 전역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감찰을 나왔던 부관과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들은 바로 그 연주였다.

당시 나는 그가 슈만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랐다. 그런데 그는 이 작품이 무슨 곡인지, 어느 연주인지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찬 바람이 부는 곳에서, 열악한 음향 시스템으로도 그 연주를 식별해낼 수 있을 만큼의 고수였고, 게다가 지금도 그 음반을 갖고 다니며 들을 만큼 그 연주를 좋아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잘난 첫하는 어떤 말도 없이 그저 앉아 음악만 듣고 가더니만, 이렇게 십 년 만에 길바닥에서 나를 감탄시킬 줄이야.

나중에 전해 들으니 그는 대단한 클래식음악 애호가였더고 한다. 정말 많은 음반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음악과 연주를 들어 섭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군에서 전역을 하고 취직을 했다가 그만 빚보증을 잘못 서서 전 재산은 물론, 그 많은 음반들을 모두 압류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슈만 음반만은 가장 좋아한 나머지 그렇게 간직하고 있었고, 늘 지니고 다니기까지 한 것 같다. 자신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음반을 내게 주다니. 아니, 무엇보다 그날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니. 정말 귀한 선물이었다. 내가 그 음악을 좋아할 때는 LP로만 발매됐는데, 그가 준 것은 이후 일본에서 CD로 재발매된 것이었다. 이후 한동안 언제 어디든 그 음반을 지니고 다녔다. 그를 대신해, 그가 지니고 다녔던 것과 같이.

공저, <행복한 클라시쿠스>, 생각정원, 2012, 135~140p